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0년 11월 15일 독일을 방문했을 때 미노리텐 교회에 있는 아돌프 콜핑의 무덤을 찾았다. 교황은 그곳에서 이런 말씀을 남겼다 :

"나는 아돌프 콜핑신부와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고 있는 국제콜핑협회에 감
사의 뜻을 전하고자 이 곳에 왔습니다. 오늘날 콜핑 공동체가 전 세계의 50여개국으로 확
장되었고 최근에는 풍성한 은총으로 제 3세계에서도 급격히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특히 어디에서나 많은 청소년들이 여러분의 공동체에 소속
되어 복음을 증거 하도록 위탁받은 삶을 지표로 삼아 …. 아돌프 신부와 같은 이런 선구자
상(象)은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필요합니다."

Ⅰ. 아돌프 콜핑의 생애와 업적

콜핑의 출생 당시 상황

쾰른(K ln)과 뒤렌(D ren)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도시인 케르펜(Kerpen)에서 1813년 12월
8일 아돌프 콜핑은 출생했다. 그 당시는 많은 불안과 변화의 시기였다. 이 시기를 4가지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겠다 : '경제 혁명, 사회 혁명, 정치 혁명, 영적 혁명'.

경제 혁명

19세기 전에는 대부분의 유럽인은 경작을 했다. 상업과 무역에 종사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기계가 발명되고서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공장의 생산량이 증가했으므로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농지를 벗어나 공장 지대로 수많은 사람이 몰려가서 살았다. 산업화 이전
의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제들이 이제 생겨났다.

사회 혁명

18세기의 농민과 직공 사회는 공동체 중심이었다. 농촌 지역에서 농민들은 서로 돕고 농업
협동 조합을 형성했으며, 직공들은 자신들의 동업 협동 조합을 가졌다. 산업 혁명은 이들을 공동
체로부터 분리시켰다. 농촌 계층은 붕괴되었고 동업 조합의 연결 고리는 해체되었다. 한편으로 보
면, 이는 더 많은 자유를 의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인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
고 산업화 사회에 내팽개쳐진 꼴이었다. 따라서 이전에 독립적이었던 농부와 직공들의 기능직은
새로이 생겨난 자본에 파멸적으로 종속되었다.

정치 혁명

프랑스 혁명으로 자극 받은 중산층은 눈에 띄게 정치 권력의 한 자리를 잡았다. 이는 특히
유럽이 나폴레옹의 군사 통제에서 풀려나게 된, 1813년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일어난 제국 전
쟁 이후에 특히 그렇다. 전제주의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는 실패했으며 자유라는 이념은 점점 성
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자유는 19세기의 자유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국가는 자국의 시민을 보
호할 의무가 있었지만, 그들의 생활에 간섭할 권리는 없었다. 이러한 이념은 이미 권리와 재산을
소유한 자들에게는 도움을 주었으나,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못되었다.

영적 혁명

산업 발달을 위해서는 경제적인 장애물, 사회적인 유대, 정치적인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야
했다. 이러한 자유에 대한 요청은 정신적인 권위인 종교, 교회에 또한 대립되게 되었다. 성급한
낙관주의를 갖고, 사회는 신의 의사로 방해받지 않는 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영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힘과 대결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영적인 격변은 19세기 초반을 지배했으며, 보통 "사회 문
제"로 묶을 수 있는 문제들을 낳았다. 그 해결은 19세기 후반의 주된 과제였다.
이와 같은 배경을 생각하고 우리는 아돌프 콜핑의 삶과 업적을 봐야 한다. 성직자, 사회 교
육가, 그리고 사회 개혁가로서 그는 그 "사회 문제"의 해결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도제공 구두장이

학교를 졸업하고 콜핑은 직업으로 구두 수선을 배웠고, 케르펜에 있는 조그만 구두가게에서
도제공으로 일 했으며 나중에는 쾰른에 있는 아주 큰 구두 공장에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콜핑
은 산업화가 도제공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쳐서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살았던 장인의 집에서 나오
게 되는 걸 직접 목격했다. 이로 말미암아 사회 통제가 느슨해지고 종교가 뿌리 뽑히게 되었다.
일단 작업장을 나오면 여관과 술집이 많은 도제공들의 "안방"이 되었다. 콜핑은 이와 같은 생활
양식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뿌리 깊은 종교적인 성장과 그 외 더 많은 교육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콜핑은 신부 수업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신학 공부와 서품

상당한 준비를 한 뒤 24세의 콜핑은 1837년 가을에 쾰른의 마르쩰렌(Marzellen)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841년 봄에 졸업했다. 신학 공부는 뮌헨에서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새로 싹트기 시작한
가톨릭 운동모임에 가입했다. 콜핑이 가장 존경했던 교수들은 될링어(D llinger)와 빈디슈만
(Windischmann)이었다. 또한 빌헬름 임마누엘 케틀러(Wilhelm Emmanuel von Ketteler) (나중에
마인쯔의 주교가 됨)와도 사귀었다. 케틀러는 콜핑이 나중에 "도제공의 아버지"로 일하게 되는 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 당시 콜핑은 신학 수업에 더욱 관심이 있었으며, 도제공 조합을 세우는
데 관심이 없었다.

1842년에 콜핑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받아 준 뮌헨의 집을 떠나 본(Bonn)에서 공부
를 계속했다. 그 당시 본 대학의 상황은 이성과 과학의 신념을 지지한 게오르그 헤르메스(Georg
Hermes) 교수의 신학적인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비록 교황 그레고리(Gregory) 16세가 헤르메스의
이성주의를 1835년에 비난했지만, 그 교수의 위치는 매우 강력했다. 강력한 상대자는 디에링어
(Dieringer) 교수였는데, 콜핑은 이 분을 평생 친구이자 지지자로 여겼다. 콜핑은 아주 적극적으로
헤르메스 교수를 반대하였으며 곧 반헤르메스 학생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신학 공부의 마지막 해
는 쾰른의 신학교에서 보냈고, 드디어 1845년 4월 13일에 쾰른의 미노리텐(Minoriten) 교회 부주
교인 클라에센(Claessen)으로부터 서품을 받았다.

부퍼탈 엘베르펠트(Wuppertal-Elberfeld)에서 사목활동

콜핑이 첫 번째로 사제로서 사목활동 한 곳은, 유럽의 새로운 산업화 영향을 받은 도시의
대표격인 엘베르펠트이었다. 여기서 콜핑은, 나중에 1848년 산업 혁명으로 불리게 되는 부정적인
측면을 알게 되었다. 콜핑은 이러한 끔찍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비참한 삶을
누리는 광경을 부퍼탈에서 처음 목격하였다고 될링어(D llinger)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비참하다는 말은, 노동자들의 경제적인 곤경뿐 아니라 사회적인 어려움도 포함했다. 노동자
들은 대개 농촌 출신들이었는데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공동체)가 제공해 주던 사회
적 유대를 잃어버렸다. 과거에는 교회와 전례력이 모든 마을 활동의 축이었다. 그러므로 산업화된
지역으로 떠난 사람들의 뿌리가 뽑힌 것은 장소뿐 아니라 종교도 그러했던 것이다.

도제공 조합의 설립

콜핑은 도제공들의 문제 해결을 찾아보려 했다. 스승인 요한 그레고르 브로이어(Johann
Gregor Breuer)가 세운 도제 조합에서 콜핑은 필생의 활동에 대한 자극을 발견했다. 1848년 11월
될링어(D lling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콜핑은 도제공들과 일해 보고 싶다는 욕망을 나타내었다.


" 이 도제 조합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 결과, 내가 이 길을 가도록 하느님께서 점지하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뮌헨에서 그리고 그 후에 나는 신학을 계속 공부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지금 나는 독일 가톨릭을 통해 이 조합 단체를 만들고 싶어요. 사회
와 종교상의 문제가 해답을 요구하는 요즈음, 이 조합은 그 답들을 성취하는 완벽한 수단
이 될 것이고 또한 우리 가톨릭은 그들의 친구라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입
니다."

그 외 이러한 목적을 위해 콜핑은 라인란트(Rheinland)의 중심인 쾰른으로 옮겨서 주교자
성당의 주임신부가 되었다. 1848년 5월 6일에 콜핑은 7명의 도제공과 함께 도제공 조합의 콜룸바
(Kolumba) 학교를 설립했다. "도제공 조합"이란 글에서 콜핑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콜핑의 목적

콜핑의 목적은 일하는 젊은이, 특히 그 자신이 직접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된 도제공들
을 도우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간단한 답이었지만 실제로는 더 복잡한 답이 요구되었다. 시작
하게 된 계기는 도제공들의 현실적인 삶에 대해 그 자신이 느끼는 깊은 불안감이었는데, 콜핑 스
스로 도제공으로서 또 엘베르펠트의 사제로 몸소 느꼈던 현실이었던 것이다. 교육은 도제공들의
운명을 개선할 수 있는 한 방법이었다. 콜핑은 넓은 의미에서 구체적인 사회 변화를 만들려고 애
썼다. 그러므로 콜핑은 무산 계급에서 제일 큰 집단인 도제공들의 생활 방식을 개선하기 위해서
교회 신학적이면서도 교육적인 자조 자립 집단을 구상하였다. 삶의 정치적/종교적 차원을 통합하
는 이러한 개념(직업과 가족)은, 사회의 한 계층이 겪는 사회적인 와해의 문제에 대해 종합적으로
답해 보려는 첫 번째 예라고 볼 수 있다. 사회 문제란 경제적/정치적 수단만으로 해결될 수 없고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콜핑의 이러한 이념은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유용하며 어려운 사회 문제를 해결코자 할 때 사회 조직을 통해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콜핑이 얘기한 사회 변화는 구조상의 변화, 특히 상황을 바꾸기 위한 혁명의 이용을 의미하
지 않았다. 그 대신 인류 자체를 변화시키길 희망했다. 콜핑의 주된 희망은 개개인의 행동을 재조
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콜핑에게서 신념에 찬 스승과 사회의 교육자 모습을 보는데, 그 분의 실
제적인 개념은 그 당시의 사회 이론가와 분명히 대조되어 두드러진다. 콜핑식의 사도 신경은 "방
향을 제공하여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게 도와주소서"였다.

콜핑이 생각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젊은이들을 적극적인 그리스도교인으로 가르치는 것이
었다. 비록 사회 분야에서 활동한다고는 하나, 그 자신의 첫 번째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신앙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콜핑은 복음의 선언과 사회 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므로 그 분은
교회의 사회 활동을 보여 준 선구자 중 한 분이다. 매우 현대적으로 콜핑은 썼다. "교회는 사회
문제에 대해 물러날 수 없다. 중산층의 삶을 그 뿌리깊은 적에 팽개칠 수도 없다. 교회는 삶에 적
극적인 역할을 하고 그 적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콜핑은 성직자 헌장 위원회가 "오늘날 세계의
교회"에서 옹호했던 것을 예시했다. "의식적으로 여기에 거주하지 않고 미래만 계획하며 따라서
세속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자들에겐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세상 활동에만 전념하고
종교적인 삶은 무시하는 자들도 잘못되었다."

콜핑이 볼 때, 크리스천이 된다는 건 그리스도교 바탕에서 전체 자아를 형성하고 그리스도
교의 목표와 과제를 향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콜핑은 개개인이 갖고
있는 모든 삶의 영역(가족, 직업, 사회, 국가)에 영향을 끼치길 원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 분은
지난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 개혁가 중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젊은이들을 성실한 노동자,
가족, 시민이 되게끔 훈련시키는 콜핑의 프로그램은, 종교적 목적 외에도 사회를 그리스도교적 의
미로 변화시키는 목적을 추구했다.

Ⅱ. 신앙에 대한 아돌프 콜핑의 이해와 실행

아돌프 콜핑에 의하면, 신앙은 젊은이들을 종교적/사회적으로 키우는 근본이다. 콜핑은 이
러한 생각을 글로 표현했다: "인생이란 신앙에 좌우된다. 좋든 나쁘든 신앙의 살아 있는 표현이
사회적 삶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모든 이의 인생에서 주춧돌이다. 종교적인 뿌리가 없이는 인간
의 상호 작용과 활동은 불가능하다. "도제공 조합"에서 그는 이렇게 했다. "강력하고 살아 있는
교회가 없다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없이는 삶의 닻이 없
고, 진정한 만족도, 미덕도, 영원한 정직도 없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 없이는 행복이 있을 수 없
다. 그리스도교는 인생에서 유일하고 진정 건강한 힘으로서, 그것이 실패한다면 인생은 병들게 된
다." 자신의 도제공 조합 활동의 구심점으로, 따라서 콜핑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교육과 그것
을 실제로 인생에 적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신앙과 사회적인 삶

콜핑은 종교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을 구분하지 않는다. 신앙의 실천이란, 이웃을 사랑하라
는 계명을 지키고 사회의 약속을 통해서 이 신앙의 증인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도제공 조합의
신문에서 콜핑은 또 이렇게 논했다. "이 세상의 모든 도덕 질서는 우리가 교리라고 부르는 종교
적 기둥에 의지한다. 인간이 살아가며 행하는 모든 것은 적건 많건 이런 교리에 의존한다. 사회
생활, 정치, 경제 등 주로 세속적인 개념 역시 이런 기둥에 다소 의존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러한 종교와 사회 질서의 기둥 중 하나를 빼 버린다면, 전체 건물은 파괴될 것이고 불완전한 교
체로 인해 색다른 모습과 성격을 얻게 된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으로 부터
콜핑은 그의 생존 당시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우려 했다. 도제공 조합이란 이 문제의 특
별한 해결책이었다.

도제공 조합을 통해서 콜핑은 사회를 갱신코자 하는 자신의 주요 목표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것은 사회 구조의 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교육시키고 모습을 바꿈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콜핑은 사회를 급하게 개혁하면 바람직한 그리스도교 사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했다. 오직 신앙이 깊고 능력 있는 시민들이 정의롭고 크리스천다운 사회를 위해 온 힘을 불어넣
을 때, 이 목표는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상이한 모든 계층 중에서, 도제공 조합이 선량한 크리스천 장인과 아버지, 시민들의
교육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길 원했던 것은 특히 직업, 가족, 사람들의 계층이었다. 도제공 조합의
신문 기관지에 콜핑은 이렇게 스스로 쓰고 있다:

"이들 젊은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과 아버지가 된다. 곧 그들은 시민이 될 것이다. 그
리고 그들은 비참하고 서투른 도제공보다는 훌륭한 장인이 되고, 불행의 전파자가 아니라
충실하고 도리를 다하는 아버지가 되고, 공동체의 늘어가는 짐이 될게 아니라 명예로운 시
민이 되어야 한다는 게 매우 중요함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젊은이들에게 도움
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 생활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실천이 일상
생활에서 꼭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강단에서 그
리스도교를 이론으로 가르치고, 또 아이들에게 교리 문답만 가르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
다. 우리가 가끔 가지는 비그리스도교적 삶에서 이러한 실제 생활을 그리스도교적 견해로
가르치고, 또한 그리스도교 진리의 교사가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에게 참된 인생의 길을 불
어넣을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크리스천의 책임

콜핑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인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책임도
또한 가진다. 콜핑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하느님은 인류에게 공짜로 이 지구와 삶, 정신과
신체의 힘, 그리고 그분의 은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가 홀로 일하기를 원치
않으셨으며, 하느님은 우리가 그 분의 창조하신 목적을 위해 노력하면서 그 분과 함께 협동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 우리가 창조된 것은 잠자기 위함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서입니
다. 또한 먹고 마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런 영양분으로부터 얻은 힘을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
므로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뿌린 만큼 거두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은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창조주와 당연히 협동해야 한다.

세계의 모양을 형성하기 위한 공동 책임 때문에,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이라면 개인적인 헌신
에서 손을 뺄 수가 없다. 1860년에 아돌프 콜핑이 썼던 다음의 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옳다. "지
금 닥친 시대는, 모든 문제를 안고 세상이 돌아가고 있으므로, 우리가 낙담하여 무기력한 채로 손
을 무릎에 얹고 앉아서 지켜보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적이 우리보다 강하고 미래는 우리가 결
코 변화시킬 수 없으므로 투쟁하고 애쓰는 것은 아무 이득도 없다는 겁먹은 변명을 해서는 안됩
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신앙인 이라면 온 힘을 다해 이 세상의 진리와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하
는 게 도리입니다. 이는 과거 어느 때보다 현재에 더욱 중요한 요구 사항입니다. 인류의 가장 성
스러운 재산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은 수동적일 여유가 없습니다."


Ⅲ. 도제공 조합의 확대와 오늘날의 콜핑협회

자신의 모든 힘을 다바쳐 확대하고자 했던 콜핑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 덕분에 도제공 조
합의 수와 회원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1865년 12월 4일 콜핑이 서거했을 때,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북부, 벨기에 스위스, 프랑스의 알자크 지방, 미국의 세인트 루이스 등에 418개
의 조합이 생겼고 회원은 24,600명이나 되었다.

독일과 중부 유럽에서 도제공 조합이 빨리 성장했지만 콜핑은 자신의 사업에 견고한 토대
가 필요함을 여전히 많이 느끼고 있었다. 이를 위해 콜핑은 돌아가실 때까지 연설, 강의, 수필, 담
화 등을 계속하였다. 도제공 조합의 영적인 효과에 콜핑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었다. 콜핑은 지
역의 교구 신부들에게 바짝 정신을 차려 도제공 조합이 멈추지 않고 더욱 더 성장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격려하였다. 콜핑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성실한 크리스천이 되자
2. 맡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자
3. 좋은 부모가 되자
4. 정직하고 선량한 시민이 되자

이는 인생의 모든 면에 적용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콜핑 프로그램은 어떤 사람, 민족, 또는
역사상의 어느 특징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논문은 1982년 9월 1일∼5일 서독 뒤셀도르프(D sseldorf)에서 열린 제 87회 독일 가톨릭 회
의 중, 9월 3일 국제 교구 신부인 하인리히 페스팅(Heinrich Festing) 신부가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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