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0여년 간 역사에 자취를 남기며 사랑과 헌신으로 충만한 빛과 고고한 향기를 남긴 가톨릭 사제 한 분이 계신다. 그는 사회 개혁자로서 케텔러(Ketteler)주교, 카를 손넨샤임(Carl Sonnenscheim) 그리고 사회에 기여한 저명한 사제들과 비교되기도 하며 "도제공의 대부"로 "하느님의 종"으로 사랑과 칭송을 받아 1926년이래 하느님의 품에 오르신 분으로 인정받는 복자 아돌프 콜핑 신부이다.

그의 업적과 사업의 본질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도록 역사의 흐름에도 변함이 없다. 우
리는 이 시대에 그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그의 업적을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이 현실의 삶에 영향을 미치도록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는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친근하고 진실한 안내자로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
러므로 우리는 콜핑을 영웅처럼 추앙하여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의
헌신에서 풍기는 향기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살아 숨쉬고 있는 것처럼 혈기 왕성한 실체로서 당
대의 실제 콜핑과 대면하여 그 무엇인가를 용기 있게 얻어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뮌헨의 될링어(D llinger)교수에게 보낸 콜핑의 몇 가지 서한과 최근에 미카엘 쉬몰
케(Michael Schmolke)의 박사 논문인 "정치 평론가로서의 콜핑"을 콜핑에 대한 영신적 세부 자료
로 활용하고 있다. 이들 두 자료에서 우리는 젊은 시절의 콜핑에 대한 행적에 대해 과거보다 많
은 것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콜핑 정신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만일 콜핑 신부님이 우리 시대에 생존하신다면 그 분은……"

이 같은 표현을 축제 등의 연단에서 자주 듣게 된다. 성직자들, 사목자들, 그리고 교회의 종
사자들이 예언자적 선물인 콜핑 사상을 스스로 얼마나 많이 간직하려고 하는지 놀라운 사실이 아
닐 수 없다. 이렇게 저마다 자기 이상과 꿈을 콜핑 사상에 동화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콜핑은 과거에 집착하여 옛 시절의 좋았던 것만으로 비교하고 그래서 단지 문제 투성이만
상존 하는 것처럼 보는 현재 사람들의 자세에 결코 동감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에게 진지한 관심
을 쏟던 콜핑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과거의 장점만을 들려주지 않도록 노력하였으며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려 노력하는 정신을 그들이 잃지 않도록 가르쳐 주었다. 콜핑가족의 역할에 대한
의 식 연구에 의하면 더욱 폭 넓은 전망을 펼칠 수 있으며 또한 우리 콜핑 공동체의 장래를 위한
기회를 증폭시킬 수 있다.

테오도르 호이스(Theodor Heu ) 독일 대통령은 콜핑을 위대한 독일인의 명부에 등재하였
다. 이는 참으로 현명한 결정으로 칭송 받을 만큼 호감을 갖게 하는 사건이었다.

콜핑은 자기의 사상과 사업이 단순히 독일인의 수출품으로만 인식되어지는 것은 원치 않았
다. 오히려 콜핑은 자기의 사상과 사업을 독일 내에만 가두어 둘 수 없는 하나의 위탁물로 생각
하였다. 우리는 콜핑을 오늘날의 취향에 맞게 하여 진부한 사상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도제공들의 대부

우리가 대대로 간직하는 콜핑의 이미지는 쾰른 미노리텐 성당 앞에 세워 둔 그의 기념비에
잘 나타나 있다. 1903년 7월 12일 기념 동상의 제막식을 가졌다. 사제와 노동 청년과의 떼어놓을
수 없는 결속을 상징하는 이 기념비는 헌신적인 사랑과 봉사를 나타내는 영원 불멸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 기념비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가장적인 감독, 정서적인 부드러움, 넘쳐 나는 보호 정신을
자아내고 있다. 이와 같은 부성적(父性的)이미지는 제막식이 거행되던 당대와 일차 세계 대전의
젊은이들에게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콜핑의 부성은 하나의 사표(師表)로서 부드럽
게 용서해 주는 부성이 아니라 인생의 굳건한 길을 제시해 주는 훌륭한 교육자의 준엄한 목소리
로 살아 숨쉬고 있다.

"젊은이들이 부드러운 부성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일이든 스스로 해야 한
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콜핑의 부성은 어버이의 근본적인 덕성과 일치하는 성품들을 깊이 간
직하고 있으며 이 같은 성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고 형제애의 정신으로 발전하고 있다.

충고와 도움

콜핑의 영성적인 밑바탕은 말씀(Word)이었다.

그는 실제로 이 부성을 위하여 전심 전력했다. 그러나 물론 그는 신앙에 대한 영적인 힘,
하느님께 대한 신뢰, 교육, 봉사와 인간 교육에 전념하는 사랑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콜핑은 자신을 유창한 웅변가나 연설가로 생각하지 않고, 항상 충고와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한 지붕밑에서 책임을 맡아 살았다. 영적이고 물질적인 자기 충족을 위하여, 그리하여 자기 인생
을 완성하려는 세련되고 훈련된 젊은이들을 돕기 위한 그의 성실한 인내가 있었다. 창시자의 성
작(Grail)의 보관자가 아니라 내일의 교육 사회에 첫발을 디딘 신심 깊은 스승으로서 그는 다른
이에게도 같은 일을 하도록 자극하고 촉구한다.

"더 좋은 세상에 살고 싶으면 여러분 스스로 그 세상을 창조하라" 이와 같은 주장으로 콜
핑의 사상은 오늘날의 크리스천을 위한 안내자로 작용할 수 있다.

지성적이며 신심이 깊음

콜핑은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케르펜(Kerpen)의 가난하고 조그마한 집에서 보낸
유년 시절은 그에게는 매우 소중한 유산이었다. 이것을 신앙심으로 감수한 그는 하느님의 은총으
로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선용했다.

공부를 계속할 수 없어 제화공 기술을 배워야 했던 그는 가난한 기능공이었지만 쾰른의 최
고급 제화점에서도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지적으로 가정처럼 편안한 느낌을
결코 갖지 못했다. 그들은 술과 음담 패설을 즐기고 시기하고 그러다가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였
다. 그는 그들에게 방관자로 또는 흥을 깨뜨리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그는 독서에 심취했고 그
의 행동과 생활 방식은 그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사제가 되고 싶었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은총만으로 가능하지만, 당대의 젊은이들에게는 그것은 상류 사회의 진입으로
생각되었다.

과학자를 열망하다

우리가 우연히 읽은 어떤 책에서 콜핑은 도제공과 학창 시절에 자기 성소를 틀림없이 감지
하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그가 이와 같은 목표(성소)를 추구하고 자기 성
소에 응답했던 그 열성과 열망, 인내심의 깊이로 보아 그가 자기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도량이
넓고 지식을 갈구하며, 결심이 곧은 젊은이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쾰른의 고등학교, 뮌헨대학과
본(Bonn) 대학 시절까지 항상 근면 성실하며 명석한 학생이었다.

콜핑은 시험 결과로 만족하는 그런 유형이 아니었으며 지성을 갖추고 진리와 지식을 탐구
하는 분이었다. 그는 지식 및 지성의 선물을 지금까지의 인생 경험과 결합시켰다. 또한 지식의 전
달을 후일 모든 인간 사회 계층이 이해할 수 있게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가진 분
이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 아니 사목 생활의 첫 해 까지도 그는 클럽이나 협회를 만들어 인생 안내
를 하겠다는 꿈을 가진 바가 조금도 없었음은 주지할 만한 사실이다. 그의 마음은 과학자에 있었
다. 그는 박사 학위 논문을 위해 될링어(D llinger) 교수와 관계를 가졌다. 그는 오로지 "사목"에
만 헌신하기 위하여 -졸업 시험 후에는 책과 손을 떼는-"초야"에 묻히는 그런 신학자는 아니다.
사제로서 더욱 폭 넓은 인생을 위한 최종 결단은 1848년 11월 28일 될링어(D llinger)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사제가 되느냐, 과학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모두 같은 축복
을 받을 수 있다. 사회적인 관점이 종교적인 관점과 상충될 때 콜핑협회는 이러한 관점들을 해결
할 교량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콜핑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정신적이고 지적인 운동을 빈틈없
이 관심 깊게 인식한 분이다.

방관자가 아닌 적극 참여자

"콜핑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quot;고 프링스(Frings) 추기경께서 1965년 제 3차 국제 콜핑의
날에 말씀하셨다. 콜핑은 추종자나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논쟁 중의 날카로
운 주장에 응수했다. 제화공 시절부터 후일 고등학교와 본(Bonn)대학 시절까지 그의 선배나 스승
에게 명석하고 날카로운 판단으로 토론했다. 그의 어떤 스승들은 젊은이들을 가르칠 능력이나 의
향조차 없었다.

교회 당국도 그러한 관점으로 보아 협회 사업에 충분한 이해가 되었던 것 같다. 그를 매우
좋아했던 대주교는 그와 가장 친숙한 관계를 맺었다.

콜핑은 자기 사명을 통찰하고, 자기 추종자들에게는 사랑과 봉사로, 하느님 나라에는 열정
으로, 자기 양심을 따라 행동했다. 그는 모든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혹독한 시험과 시련을 겪고
이겨내야 했다.

콜핑은 인생을 알며 인생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신앙심으
로 모든 하느님의 선물들, 그가 읽을 수 있었던 책들과, 그의 저술 활동을 위한 그칠 줄 모르는
노동 정신에 대하여 감사했다. 그는 정신적인 관심을 현실적인 실천과 결합시켰다. 그는 조직과
경영뿐 아니라 지적인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로 능숙했다. 그는 능숙하게 당국과 잘 대처하였으며,
그들과 인연을 맺어 당시 사람들의 마음과 돈주머니를 열었으며, 쾰른에서 토지를 구입하여 젊은
이들을 위한 첫 콜핑 하우스를 지었다.

콜핑은 멀리 있는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땅 위에서 살아 행동하는 분이며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한 분이다. 그는 젊은 여자들을 알고 좋아했다. 주위에 미모의 여자들이 많았던 그는 스승 쉬
마트(Schmat)의 딸에게 반하기도 했으며 그의 제화점 주인의 딸에게 애정을 느껴 봉직중 결혼할
뻔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눈먼 사람이 아니었다.

이 일로 우리 마음속에 그의 이미지를 흐리고 어둡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정반대이다. 그것
은 후일 그 당시의 위기 상황을 얘기하는 윤리 도덕가가 아니라, 지도 신부로서 사랑 그리고 결
혼의 즐거움과 행복을 젊은 도제공들에게 설명할 사리 분별 있는 지혜를 하느님은 그에게 주었던
것이다.

정치에 관심 깊은 사람

우리는 당대의 정치가로서 그의 삶을 이해하고 존경하지 않는다면, 콜핑의 이미지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콜핑은 신앙이 깊고 양심이 바르고 자기 성소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포
기한 사람이었다. 그는 인류의 이익을 위해 이 세상과 관계를 맺었으며,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하
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명을 실천하여 평화를 이룬 교회의 개척자였다.

오늘날은 100여년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 우리는 전제 군주의 엄한 통치 아래 살고 있
지 않으며 또한 콜핑이 1848년의 혼돈 상태 하에서 위험한 선동 정치가의 손아귀에서 젊은이를
보호해야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콜핑 신부님이 살아 계시다면, 지식인들에게 위탁할 것이고, 저술의 70% 정도를 정
치에 할당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점을 들어 권력의 오용과 민중의 잘못된 인식을 경고하기도 한다. 그는
그의 생존시 불가피하게 활발한 정치 활동을 벌였으며, 그 당시 정치인들보다 앞서 나갔던 분이
다.

콜핑은 사회의 복지, 인류와 국가에 대한 성실한 크리스천의 정신과 연설 및 행동의 상호
결합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자유는 모든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매일 새롭게 다시 얻는 일종의 선물이다. 그의 가
르침에 대한 이 같은 생각과 감사의 표시로, 용기 있는 사람들이 공공 생활의 짐을 떠맡으려고
시시각각으로 협회에 가입해 왔다.

콜핑과 같은 사람의 완전한 모습을 그린다면 그것은 대단한 업적이 될 것이다. 우리들의 목
적은 예전의 19세기, 사회주의적 가톨릭에 콜핑을 등장시켜 감사의 월계관으로 장식할 것이 아니
라, 사실 그대로의 콜핑을 이해하여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희망찬 힘을 얻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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